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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3-11 06:04:26, Hit : 8511, Vote : 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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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 30회
2003년 3월 11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 名將열전〈30〉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英)(하)
  
                                                   www.libertyclub.org



    
풀러는 1차대전후 영국으로 돌아와 항구적 왕립탱크부대 창설을 위해 로비를 열심히 했고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로인해 그의 앞에는 1차대전전 그의 반대자들외 또하나의 적수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번의 적수들은 말(馬)들을 철제로 된 탱크들로 교체하는 것을 반대했던 영국 기마부대의 기득권자들이었다.
그러나 풀러는 남이 자기를 바보로 만드는 것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거나 논란을 피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었다. 그는 반대자들에게 격렬한 반격을 가했다. "과학보다 나은 훌륭한 것이란 이세상에는 아무것도 없다. 적과 싸우는 임무에 종사하는 우리들은 마술사의 마술지팡이(기갑전)를 붙들어야 하며 우리말을 듣도록 미래를 우리 손아귀에 장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는 소속부대 참모임무외 계속해서 그의 군사이론을 뒷받침하는 글들을 폭넓게 발표해나갔다. 대전에서의 탱크의 역할(1920년)과 전쟁의 혁신(1923년)등 저서들은 당시의 군사사상및 관행과는 충돌하는 많은 창의적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기갑전 활용이 절대적이라는 주장들이었다.
전세계의 군사지도자들은 풀러의 이런 저서들이 극단적이며 환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비꼬았다. 1926년 참모대학 학장일 때 그의 강의내용들을 묶어 전쟁과학의 기초라는 단행본으로 펴냈다. 이시기 풀러는 동료 군사이론가인 바실 리델 하트를 친구겸 조언자로 사귀었다. 하트는 도중 잠시 정치에 외도한 것외 여생동안 풀러와 단짝이 돼 같은 길을 함께 걷는 군사이론 연구의 동반자가 되었다.
풀러는 1926년 대영제국군 본부 참모진에 참여하는 한편, 그의 군사이론에 관한 글도 계속 써나갔다.  그는 침투작전이론의 정당성을 계속 견지했고 지역 고착방위에 의존하는 것이 비효율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비판은 곧 자기 상사들과 연합국들의 분노를 샀다. 그는 마지노선(線)에 관해서 그것은 ‘프랑스의 묘비석’이 되고 말것이라고 정확하게 예언했다.
1927년과 1930년 두차례 풀러는 부대 지휘관 자리를 거절하고 1933년 소장으로서 퇴역했다. 현역에 있을 때 출판한 그의 최후의 저서, 야전작전규칙(1932년)은 기갑 공격전이 전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그의 끈질긴 주장을 더욱 뚜렷하게 묘사했다. 이 책은 오히려 영국바깥에서 이루 말할수 없을 만큼 인기가 높았고 독일과 소련 육군은 이책을 그들 참모장교들의 연구 교본으로 채택했다.
풀러는 군에서 퇴역한다음 패시스트 후보로서 하원의원에 출마, 잠시 정치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이시기 출판된 그의 저서들에는 반(反)유태주의가 희미하게 베일로 가려져 있었다. 직업군인으로서 문무겸비의 문필가 기질을 가진 그는 데일리 메일지(런던)에서 종군특파원으로 일했고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공과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이 2차대전에 가담했을 때 현역복귀신청을 했지만 현역소집은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연합국들과 적국들은 나란히 2차대전 내내 그의 전략전술개념을 연구하고 이를 보완하는등 그의 군사이론을 활용했다.
풀러는 2차대전이 끝난후 연구와 집필방향을 전사(戰史)쪽으로 돌렸다. 군비와 역사(1946년)는 무기발달과정과 역사적 사건들간의 관계를 깊고 폭넓게 다룬 훌륭한 저서로 기록되고 있다. 3권으로 된 그의 서구세계의 군사역사(1954-56년)는 인류 초기역사로부터 2차대전까지의 군사발달과정을 잘 다루고 있다. 1966년 2월 10일 영국 팔마우스에서 87세를 일기로 별세할 때 까지 그는 40권이상의 저서와 수백편의 신문 및 잡지 기고문들을 펴냈다.
풀러는 작은 키에다가 거만한 태도 때문에 ‘보니’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탁월한 전략전술이론, 특히 기동 기갑전 전략은 동시대 대부분 유럽 군사지도자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영향을 미쳤다. 그는 자기자신의 극단적 지성과 너무나 솔직한 발언과 표현 때문에 특이한 군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는 진실로 창의적인 군사이론가로서 평가받았다.
군사이론에 대한 영향력은 그의 저서들과 동료 리델 하트의 저서들을 통해 오늘은 물론 먼 미래까지도 전승되고 확산될 것이다. 그는 항상 침투작전과 기갑병력의 활용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런 풀러의 군사이론은 오늘까지 그 생명력을 이어오고 있다. 다만 전쟁기술에 대한 그의 다면적 총체적 이론은 동료 군사이론가인 칼 폰 클라우세비츠의 전쟁론과 나포레옹시대 프랑스군 장군 안트완 앙리 조미니의 전쟁기술론, 혹은 손자(孫子)병법 만큼 보편타당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옥의 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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