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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4-15 00:53:45, Hit : 8694, Vote : 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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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 35회
국방일보 2003년 4월 15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 名將열전〈35〉
                          

                                                         토미 R 프랭크스(미국)(상)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전쟁 개시후 21일째인 9일 마침내 사담 후세인정권의 거점도시 바그다드를 완전 점령함으로써 24년간의 후세인 장기독재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지난 9일오후 바그다드 시민들은 시중심 파르두스 광장에 서 있던 후세인 대통령의 동상을 미군장갑차의 도움으로 기단에서 땅바닥으로 끌어내려 일제히 짓밟았다. 그들은 또 동강난 동상 머리부분을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돌맹이와 옷가지등으로 때리는등 몰락한 압제자에 대한 분풀이를 했다.
후세인 시대는 일단 막을 내린 것 같다. 그러나 미영 연합군은 후세인의 잔당소탕과 임시정부구성등 마무리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꺼진불도 다시 보자는 것이 미국의 조심스런 태도인것 같다.
미국과 영국은 이번 참으로 어려운 국제환경속에서 외로운 전쟁을 치른셈이다. 전통적 동맹인 프랑스와 독일이 등을 돌리고 러시아, 중국등이 반대함으로써 유엔안보리 결의를 얻지못한채 개전한데다 세계적 반전데모로 인한 여론의 역풍에 시달려야만 했다.
결국 미영 연합군은 이런 난관을 뚫고 개전 21일만에 이라크 상징인 바그다드를 함락, 초지일관 결정적 승세를 굳혔다. 미영의 전쟁명분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를 무장해제해 중동지역과 세계평화및 안정을 확복하고 폭정의 원흉인 후세인을 제거, 이라크 국민을 압제에서 해방한후 민주주의 정부를 창설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런 고도의 정치 외교적 전략을 전쟁현장에서 실현하는데는 반드시 적과 싸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야전군 지휘관이 필요하다. 이번 전쟁에서 이런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사람은 바로 중부군 사령관 토미 프랭크스 대장이다.
  그는 12년전 걸프전을 지휘한 노만 스와츠코프 대장과는 달리 기자회견장이나 대중앞에 나서기를 꺼린다. 간혹 도날드 럼스팰드 국방장관과 함께 기자회견장에 나타날 때 그의 모습은 6척장신의 억센 체구와 투박한 얼굴형, 부리부리한 눈매가 위압적이다. 스와츠코프 대장은 걸프전 내내 거의 날마다 기자들앞에서 부리핑을 하고 질문을 받기를 좋아했으나 프랭크스 대장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프랭크스 대장은 1945년 6월 17일 오클라호마주 윈우드에서 출생했다. 그는 1969년 캐트린 카리와 결혼, 슬하에 딸 하나와 두 외손녀를 두었다. 그는 택사스주 시골 미드랜드시에서 성장했다. 부시가문이 한때 이 보잘 것 없는 작은 시골을 유전으로 개발, 시의 위상을 한단계 드높였다. 부시 가문덕택에 시골 기차역으로서 먼지만 펄펄 날렸던 미드랜드가 부자들이 몰려사는 현대도시로 탈바꿈 한 것이다.
  미드랜드에서 미래 퍼스트 레이디가 될 로라 부시여사도 프랭크스와 같은 고등학교에 다녔다. 로라는 프랭크스의 2년 후배다. 그러나 부시와 프랭크스는 서로 다른세상에서 살았다. 부시 대통령 아버지와 부시는 명문 예일대학에 다녔고 조지 W 부시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고 주방위군으로 군복무를 떼웠다.
프랭크스는 1967년 오클라호마 포트실 포병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임관후 67년 제9보병사단에 배속되어 베트남전에 참전, 세 번씩이나 부상을 입었다. 프랭크스는 베트남전에서 전방관측장교 항공관측장교로 야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베트남전에서 야전포병으로서 엄호사격도 하는등 다양한 군사경험을 쌓았다.
  1968년 프랭크스는 다시 포트실로 돌아와 포병훈련소에서 포병중대를 지휘했다. 1969년 독자생존 전투과정(게릴라전)을 마치고 1971년 택사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 학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은 뛰어난 군사지휘관 양성을 위해 일반대학 교육과정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그는 그후 포병고등군사반을 거쳐 1973년 서독 주둔 제2기갑연대에 배치된다.
프랭크스는 그곳에서 제1 곡사포 기갑대대를 지휘했다. 그는 또 제84 기갑공병대대장에 이어 부연대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기갑참모대학을 거쳐 1976년 국방부로 전근, 군수사국에서 감찰관으로 복무하게 된다. 프랭크스는 이듬해 육군참모총장실 의회로비활동반에서 근무하고 행정보좌역도 지냈다.
1981년 프랭크스 장군은 다시 서독으로 가 3년간 제78야전포병 제2대대를 지휘했다. 84년 펜실베니아 카리슬 육군대학에 입학, 석사과정을 마친후 시펜스버그 대학에서 공공행정을 전공, 석사학위를 받게 된다. 그는 택사스 포트후드 제3군단 부사령관으로 진급하며 이직책을 1987년 제1기갑사단 포병 사령관으로 옮길 때 까지 맡게 된다.
미국은 90년 8월 초 쿠웨이트 침공 이라크 군을 몰아내기 위해 6개월간 사우디 아라비아를 중심으로 걸프만 지역에 미군이동 대작전을 전개했다. 이것이‘사막의 방패작전’이다. 이듬해 1월 부시 대통령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사막의 폭풍작전’을 명령, 쿠웨이트에서 이라크군을 격퇴하는 대작전을 폈다. 이 작전에는 30개의 다국적군이 참가했다. 작년말 뉴스위크지는 이작전과 함께 수많은 전투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프랭크스를 ‘2003년의 인물’로 지목, 상세하게 소개한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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