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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5-20 01:04:09, Hit : 8604, Vote : 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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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 39회
국방일보 2003년 5월 20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名將열전〈39〉
                          
                                                 안트왕느 앙리 조미니(프랑스)(상)
              
                                                       (www.libertyclub.org)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지난 5월 1일 "이라크에서 전투가 끝났다"며 사실상 종전을 선언했다.
  부시 대통령은 1일 캘리포니아주 인근 해역의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 함상에서 연설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그는 "이라크 전투에서 미국과 동맹국은 적을 압도했고 이제 이라크의 안보와 재건에 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지난 3월20일 미군의 바그다드 공습으로 시작된 이라크전은 43일 6주일만에 막을 내렸다.
부시 대통령은 TV로 전국에 생중계된 연설에서 "이라크 해방은 대테러전에서 중요한 진전"이며 "이는 2001년 9월11일 시작된 대테러전 과정에서 하나의 승리를 거둔 것"이라고 강조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 국민에게 테러공격을 감행하거나 계획하는 일에 연루된 어떤 사람도 미국의 적이 된다"며 "테러단체와 관계를 갖거나 대량파괴무기를 추구하고 보유하는 어떤 무법정권도 문명세계에 중대한 위험"이라고 경고했다.
부시  대통령은 이날 오후 태평양 연안 샌디에이고 항으로 돌아가고 있던 항공모함 에이브러햄 링컨호에  조종사 복장으로 내려 조종사와 장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부시 대통령은 주방위군 조종사로 근무한적이 있다.
전략가들은 이라크전 개시전 전쟁이 6일에서 6주간내 끝날것이라고 예측했는데 이런 예측이 들어 맞았다. 후세인이 이웃 터키와 이스라엘을 미사일로 공격할것이며 생화학무기를 사용할 것이라는 예측은 틀렸다. 전쟁에는 전략전술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동서고금 전략이론서가 동원되기도 한다. 이라크전도 예외는 아니였다.
19세기초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후 지난 2세기여 동안 전세계 군사지도자들과 학생들은 프랑스 앙트완느 조미니의 군사 전략이론서를 현대전의 경전으로 연구해왔다. 조미니의 전략이론서들은 전쟁수행과정을 몇가지의 지도원칙들로 압축했다. 이 지도원칙들중 으뜸은 재빨리 승리하기 위해 대군을 동원해 적의 약점을 치는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때 쌍방 장군들과 19세기 중엽 여러 무력충돌때 유럽지도자들은 조미니의 저서 ‘전쟁기술의 지침서’를 대규모전투때 마다 주된 교과서로 휴대하고 다니곤 했다.
조미니는 1779년 3월 6일 스위스 페이에른 시장 아들로 태어나 인생을 시작했다. 그는 은행에서 잠시 근무한후 19세때  프랑스가 주도하는 스위스 육군에 입대했다. 조미니는 2년후 여단장으로 발탁 승진했다.
조미니는 곧 이어 그의 군사이론과 연구결과물을 단행본으로 발간함으로써 군대내에서 위대한 군사학도임을 입증하게 된다. 그가 1804-1805년 사이 최초로 펴낸 4권의 군사학 저서들은 프랑스 육군원수 미셀 내이 장군에게 깊은 인상을 준 나머지 그는 이 젊은 군사학 저술가 조미니를 1805년 말 아우스테리츠 전투때 그의 진중부관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1세 역시도 조미니의 군사지침서들에 깊은 인상을 받고 1805년 그를 대령계급으로 승진시킨다. 그후 조미니는 1806년 프러시아와의 전쟁때 나폴레옹 황제의 일반참모로서전략을 맡게 된다. 그는 이 전쟁때 예나와 아유라우스 전투에 참가해 무공훈장을 받게 된다.
조미니는 1808-1809년 스페인 전투에 참가하며 여기서 내이 장군과의 개인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워낙 유능하기 때문에 그의 비서실장이 된다. 조미니와 내이 장군의 인간 관계는 서로 존경하고 찬탄하는가 하면 때로는 노골적이고 공개적 적대감을 나타내는등 기복이 심했다.
  조미니와 내이 장군사이 감정 악화가 최고조에 달하자 조미니는 현직을 사임하고  러시아군대에 입대하겠다고 까지 한적도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 황제가 개입해서 조미니를 1계급 특진시키는 한편 그가 내이장군도 계속 도우면서 동시에 러시아 알렉산더 1세 황제의 육군 장군자리 도 수락할수 있도록 화해를 주선했다.
조미니는 1814년 까지 프랑스와 러시아 양쪽 군대에서 복무했다. 이 무렵 나폴레옹 황제의 참모총장 루이 베르티에 장군은 조미니의 사단장 임명을 반대하면서 그를 체포하게 된다. 이유는 조미니가 자기에게 올리는 보고서 발송에 태만했다는 것이다.
조미니의 죄목은 별것 아니었다. 하지만  베르티에르 장군은 조미니의 허영심과 거만함을 극도로 증오했다. 조미니는 재주가 뛰어나 전쟁이론에는 천재였지만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그는 도저히 베르티에르 장군과 함께 일할수 없어서 프랑스 군대를 뛰쳐나가 아주 러시아의 알렉산더 군대로 갔다.
알렉산더 대왕은 반가운 나머지 그를 육군중장으로 승진시키고 다음 2년간 군사보좌역으로서 그의 자문을 듣게 된다. 하지만 조미니는 그후의 프랑스와 러시아간 전투에는 직접 참전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는 워터루 전투후 프랑스 왕정에 의한 내이장군 처형을 저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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