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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3-04 00:12:06, Hit : 8742, Vote : 5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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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 29회
국방일보 2003년 3월 4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 名將열전〈29〉
                          
                                          존 프레데릭 찰스 풀러(英)(상)
                                                
                                                 www.libertyclub.org



존 풀러는 기갑작전의 발달과정 해설과 환상적 현대전 이론을 통해 스스로를 20세기 가장 선진적인 군사이론가 자리에 올려놓았다. 전술적 문제들과 전쟁의 정치 사회적 측면에 관한 그의 저서들과 전사(戰史)는 2차대전과 전후시대 지도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풀러는 프러시아 출신 전략가 칼 폰 클라우세비츠를 닮은 현대판 전략가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878년 9월 1일 남부영국의 이치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독일에서 교육받은 프랑스 여성이었다. 풀러는 1898년 영국 육군사관학교 샌드허스트를 졸업, 소위로 임관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잠시 근무한후 1899년 남아프리카 영국군 연대로 전근되었다. 남아프리카 일부는 그때 영국 식민지였다. 케이프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식민지개척이 한창 진행중일 때 였다. 풀러는 그곳에서 영국 보병과 토착 흑인군인들을 인솔하고 보어전쟁에서 보어인들에 대항해 싸웠다. 이것이 유명한 보어전쟁이다.
보어인(Boers)은 남아프리카 공화국내 네델란드계(系) 백인들이다. 이들은 17세기 중엽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東印度會社)가 인도네시아를 중계지로 식민지를 개척하자 대거 몰려온 네델란드계 이민의 후예들이다. 18세기말부터 영국이 남아프리카에서 식민을 시작, 1814년 케이프 식민지가 영국령으로 되자 보어인 대부분은 북동부로 대이동을 해 1838년과 1852년 나탈공화국과 트랜스발 공화국을 세웠다.
트랜스발 공화국에서 세계최대의 다이아몬드 광산과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과의 대립이 격화해 1899년 보어전쟁이 발발하게 되지만 보어인들은 영국에 패하고 만다. 결국 1910년 대타협 끝에 영연방하의 남아프리카 연방이 성립된다. 처칠 영국수상이 한때 보어전쟁에서 종군기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상황아래서 풀러는 당시 영국군을 지휘한 것이다.
보어전쟁후 풀러는 영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후 잠시 인도에서 복무한후 15년간 내내 자기연대 혹은 각종 군사교육학교에 배속돼  영국 국내에서 근무했다. 이 기간동안 그는 전쟁의 원리들에 관해 관심을 갖게되었고 연구를 하기 시작했다. 그가 부단한 연구 끝에 나온 것이 포위전 보다 전술적 침투전이 미래전투 승리의 열쇠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풀러는 이런 새로운 전략전술 이론을 홍보하기 위해 부대동원과 훈련, 부대 전개등에 관한 글을 잡지와  팸프래트들에 꾸준히 기고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이런 글들을 모아 책으로 발간했다. 이런 군사이론에 대한 글들은 그의 군사학에 대한 신비주의적 접근태도와 함께 비판자들과 반대자들로부터 정면공격을 불러일으켰다. 외부로 부터의 이런 부정적 반응들은 직업군인으로서의 풀러의 입지와 군인생애를 어렵게 만들었다.
1차대전 초기 풀러는 프랑스에서 이런저런 각종 참모직책에서 종사하는 동안 침투작전만이 승리의 열쇠라는 전투이론을 거듭 확인했다. 그는 적들의 참호속의 기관총과 철조망의 장애물들, 그리고 중화기들과 맞서 싸운다면 실패한다고 보았다. 이런 전술적 상황아래서 적진을 성공적으로 돌파할수 있는 어떠한 효과적 무기도 있을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풀러는 1차대전때인 1916년 처음으로 탱크라는 신무기를 접하고 결국 탱크야 말로 성공적 침투작전 수단으로서 가장 최적의 무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1916년 12월 영국 탱크부대가 처음 창설되었을 때  풀러는 이 부대 수석 일반참모 장교 보직을 확보하고 중령으로 진급되었다. 그는 그때 최초의 탱크부대의 대규모 집단적 공격전략을 창안했고 여기 기초한 대규모 탱크공격이 독일전선을 돌파해 1917년 11월 20일 마침내 캄브라이에서 승리를 움켜잡았다. 이 집단탱크공격 전략은 마침내 기갑전시대의 도래(到來)를 기록했고 그후 탱크가 중요한 전투무기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했다.
  풀러는 영국 탱크작전을 위한 최고 기획책임자 역할을 계속했고 1차대전을 끝내기위한 최종 공격방안으로서 1919 작전계획을 성안했다. 이 1919 작전계획은 장거리 작전능력을 갖춘 4천대의 신속탱크부대를 동원, 침투작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이 대규모 집단적 탱크작전개념에 따라 탱크부대가 적진을 돌파한다음 또 다른 1천대의 탱크들이 그틈새를 이용, 적군 영토 깊숙이 침투함으로써 적군의 지휘및 통제구조를 송두리째 파괴하는 것이다.
이때 폭격기들이 엄호폭격을 하고 적 병참센터와 독일군 보충부대를 기총소사로 공격함으로써 탱크공격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풀러가 창안한 이 1919 작전계획이 실전에 활용되기도 전에 1차대전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작전계획은 깊은 종심전투 혹은 전격전 개념을 제공했고 이 작전개념은 그후의 세계대전 초기단계 전투방법을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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