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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4-29 01:08:57, Hit : 8804, Vote :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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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37회
국방일보 2003년 4월 29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名將열전〈37〉
                          

                                                    살라딘 장군(중세 이슬람국)(상)




  이라크전에 참전한 미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는 이라크전 종전과 승리를 공식적으로 선언키로 했다. 이라크전쟁은 주 참전국 미국, 영국이 계획했던 대로 단기전으로 끝났다.
미국의 미리 짜여진 작전계획에 따른 위성추적 유도무기와 초강력 각종 첨단병기들이 최대효과를 발휘한 전쟁이었다. 미군이 개전초기 너무나 긴 병참선과 이라크군의 게릴라 전, 그리고 사막의 모래폭풍 때문에 고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위기는 작전계획 수정 보완으로 곧 해소되었다.
오랜기간 후세인 독재폭압정치에 시달려온 이라크 국민들의 여론이 등을 돌린데다가 믿었던 공화국 수비대와 페다인 민병대가 파죽지세로 치닫는 미영 연합군의 지상 공중 합동 입체작전에 기가 꺾여 궤멸한 것도 미영 연합군 승리의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전비도 미전쟁사상 최저 수준인 800억달러에 머물 전망이다. 지금까지 들어간 돈은 253억달러. 하루 11억달러씩 쓴 셈이인데 앞으로 계속 더 써야 한다.
  4월 14일 현재 이라크군 사망자수는 미군 집계 기준으로 2,320명이다. 연합군 사망자 113명의 20배에 이른다. 이라크 정부 발표에 따르면 민간인 사상자가 모두 6,366명이다. 이라크 민간인 사망자는 최대 1,413명이라는 통계도 있었다. 전쟁이 단기전이었던 만큼 사상자수도 예상보다 적었다. 이라크 전쟁은 21세기형 전쟁형태를 제시한 셈이다.
패전후 행방이 묘연한 사담 후세인은 자신을 살라딘 장군쯤으로 생각하면서 성전의 승리를 호언했다. 살라딘 장군은 1,138년부터 1193년까지 중동 이스람제국을 통치하면서 유럽의 기독교국가들과 3차 십자군전쟁에서 승리한 이슬람권의 존경받는 영웅이다. 후세인은 평소 살라딘 장군을 숭배하면서 자신을 그런 위치로 끌어 올리려고 욕심 부렸지만 인물됨에서 거리가 멀었다. 후세인의 협량한 성격과 통치술면에서 살라딘 장군을 모방하기에는 까마득하게 부족한 인물이었다. 그는 역사상 무모한 전쟁을 자초했다가 패전한 독재자로 기록될 것이다.
후세인은 패전이 예정된 미영 연합군과의 전쟁에 무모하게 뛰어들어 애꿎게 민간인 인명피해와 막대한 재산피피해만 냈다. 후세인은 이처럼 지는 전쟁을 할 것이 아니라 망명을 했어야 옳았다. 그랬더라면 그는 이라크 국민들의 희생과 재산피해를 예방함으로써 마지막 성의나마 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미영군과 맞섰다가 이라크 국민들에게 씻을수 없는 전쟁의 깊은 상처와 고통만 안겨주었다.
후세인이 모방하려 했던 살라딘 장군은 중세 중동전체를 관장했던 이슬람국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그는 처음 이집트땅에 아유비드 왕조를 창업하고 중동 이슬람세계를 무력으로 통일한후 제2차 십자군전쟁에서 승리하고 3차 십자군전쟁을 휴전으로 이끈 지장이자 용장이었다.
살라딘 장군은 십자군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중동 이슬람권에서 숭배받는 명성을 얻었고 그의 기사도와 관용적 문화의식으로 인해 서방세계에서도 폭넓은 존경을 받는 큰 인물이었다. 이라크에 막대한 희생을 안겨준 후세인이 이런 관용과 용맹성을 골고루 갖춘 살라딘 장군을 모망하려 했다는 것은 터무니 없는 과욕이었다.
살라딘 장군의 군사적 지도력은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려는 유럽십자군 공세에 대항해 무적의 반격을 가했다. 그가 12세기 가장 존경받고 영향력 있는 이슬람교 지도자로 떠오른 것도 십자군전쟁 승리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원래부터 기독교와 유태교, 이슬람교도들의 공통성지였다. 십자군전쟁이 일어난것도 성지를 독점하려는 종교적 동기때문이었다.
  살라딘의 아랍 이름은 살라 알딘 유서프 이빈 아유브로서‘신앙의 영예’란 뜻이다. 그는 1138년 이라크 티크리트에서 쿠르드족 가문에서 탄생했다. 아버지는 터키-시리아국 지도자 누레딘 장군이 지휘하는 군대의 고위장교였다. 누레딘 장군은 성지를  이교도인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해방하려던 십자군전쟁에서 유럽기독교도 십자군과 싸웠다. 중세 십자군 전쟁이 개전후 200년간 계속되었기 때문에 살라딘의 아버지와 아들이 대를 이어 십자군과 싸운셈이다.
살라딘은 어릴 때 시를 쓰고 코란을 연구하는등 학자로 성장했다. 그의 이런 학자생활은 십자군전쟁이 시작될때까지 계속되었다. 살라딘은 14세때  아랍전사였던 누레딘장군 군대에 입대했다. 살라딘을 지도한 또 한사람은 1144년 서방세계의 전초기지인 에데사 시를 전복해서 명성을 얻은 사라센 젱기 장군이었다.
  살라딘은 30세때 여기서 군사교육을 충분히 받고 누레딘 군대안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1164년과 1169년 사이 이미 귀족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었다. 1169년 살라딘은 시리아군 부사령관인 시리크 장군 아래서 복무하게 된다. 그가 새보직으로 승진한후 시리크 장군이 사망한다.
그는 1174년 이집트정부를 폐지하고 자신의 아유비드 왕조를 창업한다. 이집트는 중동통일을 위한 살라딘의 권력본거지가 되었다. 그는 쿠르드족을 군대내 요직에 배치하고 이집트 경제를 발전시키며 서유럽 프랑크족 십자군을 격퇴하는 훈련을 시켰다. 살라딘은 2년만에 이집트를 아바시드 술탄국과 합병한다.  그는 이때부터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 12년후 다마스카스와 시리아, 알레포 모실과 이라크를 합병, 거대제국으로 만들었다. 살라딘은 1187년 3개월간의 유명한 하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물리치고 마침내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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