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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영무 (2003-05-13 07:20:24, Hit : 8732, Vote :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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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방일보 연재 세계명장열전 38회
국방일보 2003년 5월 13일 화요일

                            

                        

                                               여영무의 세계名將열전〈38〉
                      
                                              살라딘 장군(중세 이슬람국)(하)




살라딘은 영토확장을 시작하면서 친족들과 측근들을 지도부에 속속 배치했다. 이와 함께 그는 군대병력을 증강하고 해군을 창건하며 군사작전을 통해 나머지 모든 중동국가들도 자기 통제아래로 일원화, 완전히 장악했다.
그는 1186년 팔레스타인내 십자군 국가들을 제외하고 이집트로부터 바그다드까지 전체중동 국가들을 통일했다. 이때 살라딘은 전체 십자군침략군을 포위하고 이들에게 ‘지하드’(성전·聖戰)를 선포하고 십자군을 격퇴할 것을 맹세했다.
1187년 살라딘은 2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으로 쳐 들어갔다. 이때 1만명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 사수들이었다. 살라딘의 전술은 말을 탄 기마(騎馬) 사수들이 적 측방을 교란하고 적의 약점을 찾아내 집중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전술은 기마 사수들이 십자군의 전투포진을 흐트러뜨린후 기마 검투사들과 보병들이 집중 공격, 적군을 섬멸하는 작전이었다.
또 그는 십자군이 사막 한복판으로 자신을 추격하도록 유인했다가 적군이 기진맥진할 때 십자군을 역습, 무찌르는 작전도 구사했다. 예루살렘 성지에서 십자군을 완전히 격퇴한 하틴 전투가 바로 이런 전술로 이룩한 승리였다.
이때 이슬람군은 단기전에서 십자군 대부분을 생포하거나 살해했다.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적군과 노획물가운데는 십자군 총사령관 기 루시그난 장군과 십자군병사들이 독전을 위해 들고 다니던 깨진 십자표시판 조각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살라딘은 하틴 전투후 공격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는 1187년 10월 2일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까지 연전연승, 도시와 요새들을 점령해 들어갔다. 그는 십자군과 이런 수많은 격전을 거쳐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써 이슬람교들에게 처음으로 성지를 탈환하는 승리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십자군이 처음 예루살렘을 점령한후 이슬람교도들에게 저질른 무차별 유혈극과는 달리 십자군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관용했다. 그는 심지어 생포한 기 루시그난 총사령관도 석방해주었다. 그때 살라딘은 적장에게 석방조건으로 다시는 이슬람교도들에게 대항해 무기를 잡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고 그는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살라딘의 이런 호의에도 불구하고 십자군은 다시 3차십자군 전쟁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영국 리차드 1세왕과의 싸움이었다. 리차드 왕은 성지를 해방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리차드왕은 지중해 주둔 해군과 기 루시그난 장군의 군대지원을 받아 2년간의 포위전 끝에 중요전략거점 에이커 시를 탈환했다. 기 루시그난 장군은 살라딘에게 다시는 전투에 참가치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별도병력으로 군대를 조직해서 쳐들어왔다. 이것은 비기독교적 태도였다.
살라딘은 커다란 병력손실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재소집하는 한편, 십자군에게 도움이 될만한 모든 식량과 보급품을 불태우고 파괴함으로써 리차드왕 군의 예루살렘 진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1192년 9월 2일 살라딘과 리차드 왕은 예루살렘은 이슬람에게, 그리고 시리아 해안지대는 십자군 장악아래 두기로 하고 3년간 휴전키로 합의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기독교들의 성지방문과 신전예배를 통제하지 않고 자유롭게 하도록 허용했다. 동정과 관용보다 살육과 야만성이 판치던 중세 십자군시대  유혈을 피하고 삼가는 이런 공평한 조건의 휴전합의는 놀랄만큼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살라딘과 리차드왕 두사람중 어느쪽도 예루살렘을 단독 점령하겠다는 목표를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3년간의 휴전후 두사람은 다시 전투준비를 했으나 살라딘이 병에 걸려 사망함으로써 리차드왕과의 두 번째 싸움은 불발로 끝났다. 살라딘은 다마스커스로 돌아와 열병에 걸려 1193년 3월 4일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는 다마스커스시의 거대모스크 사원옆 묘지에 묻혔다. 살라딘은 일생동안 독실한 이슬람교도로서 아무런 재산을 남기지 않고 다만 그의 후손들이 그의 왕조를 여러대에 걸쳐 계승했을 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승리를 통해 자기시대 이슬람의 가장 위대한 군사지도자임을 실증했다. 그가 이룩한 통일 이슬람국은 십자군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교도들에게 안겨주었고 이것은 종교적 한풀이가 되었다. 살라딘은 정복한 영토를 정의롭게 통치하고 신하들로 부터는 아낌없는 존경을 받는 성군으로 기록되고 있다.
종교적 열광이 전쟁을 광범하게 확산시켰던 시기, 살라딘은 적군으로부터도 높은 존경을 받았다. 그는 기사도정신과 문화보존노력을 통해 그의 반대파들에게 문학작품에 대한 풍부한 창작동기와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중세 십자군 전쟁은 성지를 독점하려는 종교적 열광이 동기였지만 이번 이라크전쟁은 미국주도의 세계질서와 평화체제를 전복하려는 편집광적 테러리스트들을 근절, 개방적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정치적 동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런 목표가 달성되느냐는 미국의 힘과 슬기, 국제정치의 이해관계, 그리고 이라크 국민들의 호응여하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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