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영무(呂永茂)

 

뉴스앤피플 닷컴 대표겸 주필(현재)

 

남북전략연구소장(현재)

 

고려대 법대졸업, 고려대 법학박사(국제법)

 

 

 

경향신문 기자로 입사(1959년), 언론활동-55년간

 

동아일보 논설위원, 통일연구소장

 

통일원 정책평가위원

 

 

 

 

고려대 대학원에서 국제법강의

 

세종대 석좌교수

 

미국 인디애나 대학 신문대학원 연수(국무성 초청)

 

미국 조지 위싱턴대학 방문교수(풀브라이트 장학재단 초청)

 

 

 

 

대한국제법학회 이사겸 부회장

 

KBS방송 시사해설 고정출연(현재

 

 

 

 

 

 

 

 저서

 


<괴물제국 중국> <국제테러리즘 연구> <테러리즘과 저항권>
<통일의 조건과 전망> <북한 어디로 가나> <세계명장 51인의 지혜와 전략>
<좌파대통령의 언론과의 전쟁> <배반당한 민족공조> <미국장군들의 전략>
등 20권 저술

      수상

    
대한국제법학회의 국제법학술상, 서울언론인클럽 大賞한길상,
        대한언론인회주관 임승준 자유언론상(논설·논평부문)



     
연구소 3대 지표   
자유(自由) 평화(平和) 인권(人權)

     1. 건강한 민족공동체 형성 (통일)

     2. 행복한 나라 완성 (자유와 복지)

     3. 문화강국 실현 (첨단과학기술국가)

     4. 지구촌 정의실현 (소외와 억압철폐)

     5. 부정부패 없는 나라완성

 



여영무 미니 회고록 (2009년 관훈클럽 발간 '관훈저널' 봄호)
 

1. 왜 기자인가

 살다보니 일생 뉴스보도와 시사해설, 칼럼쓰기, 좋게 말해서 '시사에세이' 쓰는 언론인으로서 생업을 이어오게 되었다. 학술저서등 이런저런 저술도 17권 남겼다. 한국에서는 기자 하다가 정치에 참여하거나 고급공무원 또는 교수로 전신(轉身)하는 사람들이 똑똑하고 유능한 인재로 평가받는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비판하고 따지기 좋아하는 천성 때문에 원칙을 쉽게 타협하지 못한것이 부귀영화 누리면서 출세하는 수단인 전신(轉身)을 어렵게 만든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비판하고 따지는 것 중에서도 왜 하필 왜 기자인가.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50년대말에는 실업자 홍수로 행길이 미어질 정도였다. 명문가문 아니고 백 없는 대졸자로서 공정하게 공개시험 거쳐 취직자리를 얻을 수 있는 곳은 한두분야 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신문사 기자 되는 것이었다. 1950년대말 공개경쟁시험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신문사 말고 은행도 있었다. 요즘은 신문방송기자와 PD되는 시험이 언론고시라는 말도 있지만 그시절에도 1,000대1의 치열한 공개경쟁으로서 박이 터질 정도로 어려웠다.

 대한민국이 해방공간 3년의 혼란과 6․25전란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나 나라 기본틀이 어느정도 잡히자 공신력 있는 금융기관과 신문사등 언론기관들이 앞다퉈 우수한 인재를 공개모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때만 해도 민간방송은 기독교방송 하나뿐이고 방송기자는 공무원신분으로 분류되다시피 해서 각광을 받지 못했다.

 요즘은 장관, 국회의원, 베스트셀러 작가 유명 교수등이 대접을 받고 활개를 치지만 그때는 취직자체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 없었다. 전세계가 전면적 경제침몰로 인턴자리 하나 구하기도 어려운 요즘과 다름 없었다. 따라서 공신력 있는 신문사와 은행에 들어가는 취직은 출세가도를 달리는것 처럼 보였다. 물론 현재는 한국의 여론을 좌지우지 하는 여러명의 전업 신문칼럼니스트들이 스타대접을 받고 있기도 하다.

 나는 은행과 신문사 양쪽을 두고 저울질 했다. 은행원이냐 신문기자냐 두갈래길이었다. 은행원은 카운터에 앉아 예출금을 담당, 돈 세는 웬지 따분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틀에 갇힌 답답한 삶이라는 딱딱한 직업이미지였다. 그래서 남는 분야는 신문기자였다. 독수리처럼 고공의 하늘을 훨훨 날면서 뉴스를 나르고 정치사회의 부조리와 부정을 비판하는 것이 매력있는 직업이 될 것 같았다. 이것이 신문기자직업을 선택하게 된 이유였다.

 그래서 나는 1958년말경 경향신문사 견습기자(지금은 수습기자)공개모집에 응모해서 합격했다. 당시 경향신문은 지금 소공동 롯데백화점(구 미도파 백화점) 옆에 있었다. 경향신문은 가톨릭재단 소속으로서 당시 민주당내 신구파중 신파대표로 분류되던 부통령인 장면박사를 지지하는 정치경향 신문이었다.

 그때 경향신문 수습기자 2기생으로 함께 입사한 동기들은 임판호(林判鎬), 정태경(鄭泰卿), 조규진(曺圭晉), 신광일(申光日), 김진배(金珍培)등이었다. 우연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출신대별로 서울대 2명, 고려대 2명, 연세대 2명등이 뽑힌셈이다. 견습기간은 6개월. 처음에는  '사쓰마와리'(일선 경찰서 출입 취재의 일본말 표현)를 거쳐 각 부처를 출입하는 선배기자들을 따라다니면서 취재견습을 했다.

 그때 사장은 성품이 활달하고 정치적 감각과 기백이 뛰어난 韓昌愚 선생이었다. 편집국장은 강영수(姜永壽). 편집국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함께 근무했던 인물중 기억에 남는 선배들로는 金湖 선생(전 경향신문 교정부장,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宋元英(전 국회의원) 鄭宗植(한국일보 파리특파원), 權五琦(전 통일부총리) 李雄熙(전 문공부장관) 方一弘(전 국회의원) 尹亮重(현 동아일보 감사)씨등이다. 申泰旼 선배(재미)도 후배들에게 자상한 인상깊은 분이었다.  

 당시논설위원으로는 여적 필화사건으로 구속된 주요한(朱耀翰 ․4․19후 민주당 상공장관) 김영선(金永善 ․ 민주당 재무장관)과 이항녕(李恒寧․ 고려대교수․ 후에 홍익대총장)등 쟁쟁한 특급논객들이 있었다. 그후 정관계로 나간 분들은 하나같이 당대 필명을 날리던 분들로서 언론인으로서 성공을 토대로 발탁되었다.

 당시는 조석간제라 새벽까지 일하고 아침 9시에 출근해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동료들끼리 경쟁도 심했다. 올챙이 시절 기자생활은 언론인이면 누구나 다 아는 얘기니까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이렇게 해서 나의 초년생 기자생활은 시작되었다. 경향신문은 나의 첫 언론무대였다.

2. 자유당 독재와 경향신문 폐간사건

  1959년 경향신문은 이승만의 정치적 라이벌인 장면 부통령을 지지하는 정치색이 분명한 정론지로서 이승만 대통령의 4선과 장기집권을 극열하게 반대했다. 이 때문에 경향신문은 자유당으로부터 미운털이 박혀 내내 증오의 대상으로서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이즈음 경향신문은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집중적인 괴롭힘을 당하면서 타도대상 1호로 찍혔었다. 경향신문에 몸을 담은 나와 동기생들도 선배따라 저절로 올챙이 언론투사로 돌변해 자유당의 언론탄압에 항거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신문사 초년생으로서 박봉에다 이것은 몹시 지루하고 괴로운 일이었다.

 자유당은 이승만의 4선준비를 착착 준비하면서 제일먼저 경향신문에 재갈을 물리는 작전에 돌입했다. 도끼날같이 내려찍듯이 날카롭게 두들겨패는 경향신문을 없애지 않고는 이승만의 4선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자유당의 판단이었다. 자유당의 경찰 정보기관들은 매일매일 경향신문기사를 이잡듯이 집중적으로 뒤지면서 24시간 감시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첫 언론무대였던 경향신문이 이처럼 언론탄압에 시달리다 보니 나도 매일같이 항상 긴장하고 경계해야 할 불리한 환경조건이었다.

 벌써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은 경향신문의 춘추필봉을 꺾으려다 4․19학생의거로 결국 붕괴되고 경향신문은 불사조처럼 복간되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이승만 독재와의 싸움에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던 최전성기였다. 자유당 정권과 경향신문사이 사활적인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시한폭탄처럼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어렵사리 운좋게 경향신문에 입사해 앞길이 창창했는데 입사 4개월만에 자유당이 경향신문에 포문을 열기시작한 것이다. 1959년 4월 30일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은 ‘4선의 걸림돌’로서 눈에 가시같은 경향신문을 페간해버린 것이다. 그때부터 입사동료들은 갑자기 실업자 아닌 실업자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 2기생들은 폐간된 경향신문을 일으켜 세우려는 일념아래 매일 회사에 출근해서 선배들 지시에 따라 이 심부름 저 심부름을 하면서 고통과 불안속에 수개월을 보냈다. 결국 그런 고통은 1960년 4․19 학생의거가 폭발, 경향신문이 복간될 때 까지 근 1년간 계속되었다.

  이승만(李承晩)정권은 10년간 정권유지를 위한 부정부패와 야당탄압으로 일관했다. 1959년 새해 1월 5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시카고 데일리 뉴스>기자와의 회견에서 제 4대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할 뜻을 밝혔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 나이는 이미 84세의 고령이었다. 그의 조기출마 의사발표에는 고령이지만 자기가 국사를 충분히 처리할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과시하고 야당이 후보자를 내기 앞서 기선을 잡자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때 경향신문 폐간의 악역을 맡은 사람은 全聖天 공보실장이었고 홍진기(洪璡基)법무(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아버지) 崔仁圭 내무장관등이 진해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경향신문 폐간결정에 대한 최종적 수락을 얻어냈다.

 경향신문은 1년동안 법정투쟁과 국민여론을 등에 엎고 고군분투했으나 무소불위의 독재권력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한때 가처분신청이 받아들여져 전 사원들이 오 밤중에 신문발간 준비를 하고 있는중에 자유당 권력은 적용법률을 바꾸어 다시 무기정간을 때림으로써 경향사원들은 피눈물을 머금고 독재적 광풍이 지나갈때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이때 나는 실업자의 고통을 무한정 견딜수 없어서 군복무를 거쳐 그후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에도 나는 경향신문이 권력의 갖가지 개입과 압력등 모진 우여곡절을 숱하게 겪으면서 오늘에 이른 것을 지켜보았다. 50년전과 오늘의 경향신문을 회상하는동안 한가지 뚜렷한 교훈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무릇 모든 언론은 방송이건 신문이건 권력과 政派를 편들어서는 절대 존립할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언론의 생명은 政派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율성의 견지이다. 언론이 이 두가지 원칙을 준수하는한 일시적 난관은 있을지라도 영원한 생명력을 가질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3. 동아일보 입사 한달후 5․16 맞아

 동아일보 입사시험때 1천여명 이상이 응모했다. 이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다. 육당 최남선의 동생인 최두선(崔斗善) 사장이 직접 면접을 보았다. 최두선 사장은 경찰을 통해 필기시험학격자들에 대한 신원조회자료를 토대로 면접을 한다고 그뒤에 들었다.

 최 사장은 키가 훤칠하게 크고 육중한 몸집의 비교적 거구로서 인간적 위엄이 넘쳐 흘렀다. 말도 매우 신중하게 했다. 입사 바로 다음날 최 사장은 편집국에 올라와 갓 입사한 견습기자들 이름을 일일이 거명하면서 열심히 근무하라고 일러주었다. 최 사장은 우리나라 3대천재 육당 최남선의 아우로서 같은 DNA관계인지 역시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인상을 받았다. 최 사장은 그후 박정희 정권의 초대 국무총리로 입각함으로써 정치에 투신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으로서는 일제시대부터 우리나라 민족지인 동아일보라는 후광을 정치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정통성의 취약성을 보완하려는 전략인것 같았다.

  최두선 사장은 그날 아침 편집국에서 사회부 책상에 앉아있는 백광남 기자옆으로 다가가 언젠가 반드시 필요할때가 올테니 그때를 대비해서 러시아어를 잊지않도록 꾸준히 갈고 닦으라고 권고했다. 백 기자는 외국어대 러시아과 출신이었다. 최 사장이 그런 말을 할때 미소동서냉전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고 남북간에도 긴장이 고조되었던 시절이었다. 그때 그런 발상을 떠올린다는 것은 혁명적인 것으로 미래를 꿰뚫어본 선견지명이라고 생각되었다. 백광남 기자는 아주 착하면서도 수재로서 러시아 문학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1960년 중반 베트남 전쟁에 동아일보 특파원으로 갔다가 교통사고로 아깝게도 순직했다.

 동아일보에 입사한지 한달 반만인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장군이 주도한 5․16군사쿠데타가 터졌다. 4․19학생의거후 7․29총선으로 간신히 들어선 장면(張勉)민주내각이 집권 9개월만에 붕괴됨으로써 민주헌정이 군사쿠데타로 중단 된 것이다. 민주당 신구파가 박이 터지게 싸우다가 결국 이런 비운을 맞게 된것이다. 장면 정권은 상황을 장악하지 못하고 거꾸로 주변정치 상황에 휘둘리면서 매사에 효율성이 실종되고 취약했다.

 그시기 지난 1998년~2008년까지 10년간 좌파정권기간 친북반미세력들이 길거리 정치를 좌지우지 하듯이 친북좌파들이 학생들을 선전선동, 매일같이 혁신계의 반정부 데모가 일어났다. 구호도 반공법 철폐와 통일, 남북협상, '김일성 만세'등이며 횃불데모가 비일비재했다. "가자 판문점으로" 하는 구호가 공공연히 외쳐지는등 나라가 온통 용공분위기데 압도돼 혼란이 극에 달했다.

 오늘날 한나라당이 친이(親李) 친박(親朴)계로 나뉘고 친이계중에서도 월박(越朴) 야박(夜朴)하는 식으로 4분5열 분파작용이 일어나 허우적 대는 것을 볼때 국정이 극도로 혼란했던그 때가 저절로 떠오른다. 그때 민주당 신구파간 탐욕스런 정략적 분파작용과 갈등이 지루하게 국정의 혼돈상태를 초래하고 이것이 국민의 신뢰를 잃게된 원인이 되었다. 외부에서 오랫동안 노리고 있던 쿠데타세력이 이틈을 교묘히 비집고 들어와 헌정중단의 불행을 맞게 된 것이다.

 당시 나는 삼선교에서 하숙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 하숙으로 배달된 동아일보를 받아보고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터졌구나 하는 충격이었다. 또 신문을 검열하는 계엄과 군부통치가 얼마나 갈까 걱정이었다. 경향신문이 한때 폐간되어 1년간 그 고생을 하다가 동아일보에서 다시 기자생활을 시작했더니 출근 1개월 반만에 또다시 군사정부와 언론사이 그 지긋지긋한 힘겨운 싸움을 시작해야 하나 하고 짜증이 났다.

 회사로 가려고 집을 나서니 삼선교부터 혜화동 로타리 그리고 명륜동 세종로 광화문에 이르기까지 총을 멘 국방색의 쿠데타 군인들이 촘촘히 서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서울시내는 쿠데타군으로 삼엄한 분위기였다. 물론 그날부터 전국에 비상게엄이 선포되어 신문은 검열하에 들어갔다.

 고재언(高在彦) 선배를 따라 찝차(그때 취재차는 모두 찝차였다)로 남대문 근방 서울시경으로 취재를 나갔다. 찝차가 서울시경앞에 다달으자 문을 열고 내리기전 고재언 선배가 집차 앞문턱에 오른발을 얹어놓고 출입구 군인에게 방문요건을 설명하자 새파란 젊은 친구가 "당신 발 내리라"고 일갈하는 것이 아닌가. 아! 벌써 서울이 군인세상으로 바뀐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벌써 쿠데타군 장교인 이규광(李圭光) 대령(?)이 옆구리에 총을 찬채 민간국장을 밀어내고 국장자리에 앉아있었다. 고재언 선배와 몇사람의 기자들이 국장실에 모여 이규광을 보고 앞으로 어떻게 되느냐고 물으니까 자기도 위에서 명령이 있을때 까지 전혀 모른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군인들이 완전히 사태를 장악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이규광씨는 1980년대 '12․12 쿠데타'로 집권한 신군부의 우두머리 전두환 장군의 처삼촌으로 전 장군의 장인인 이규동(李圭東)씨의 친동생이었다.

 결과적으로 이규광씨 한집안이 5․16때부터 12․12 신군부등장까지 직 간접적으로 혈맥, 혼맥 군맥등을 고리로 이리저리 군부실세들과 얽히고 설켜 두 번에 걸쳐 쿠데타실세들과 연결 된 셈이다. 이순자씨의 아버지인 이규동씨는 나중에 대한노인회 회장을 맡아서 노인복지를 위해서 일정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장도영(張都暎)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서 쿠데타군 총지도자로 등장했다. 하지만 과연 누가 진짜 쿠데타를 조직하고 실행에 옮겼을까 궁금증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윤양중(尹亮重) 선배가 삼각지에서 찝차 무선전화로  2군 부사령관인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의 진짜 주동자라는 기사를 본사로 보내는 소리를 간접으로 들을 수 있었다. 그때까지 박정희라는 사람은 일반대중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전혀 생소한 이름이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군사쿠데타를 진압하려면 피를 흘려야 하며 군이 쿠데타군과 진압군으로 분열되면 북의 남침도발이 우려되는 것으로 판단, 진압 할 수 없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미국정부 역시 기정사실의 진압에 반대했으며 진압여부는 한국정부의 책임으로 돌렸다. 당시 서울에는 불과 3천명의 구데타군이 진주하고 있을뿐이었다.

 <대통령과 장군>(나남출판 2002년 김준하 저)과 <세기의 격량>(팔복원 2005년 이한림 저)에 따르면 윤보선 대통령은 1군사령관과 예하부대에 담당 비서관을 보내 "불상사가 발생하거나 희생이 발생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휴전선 방위에 만전을 기하고 이나라에 유리한 방향으로 귀하의 충성심과 노력이 발휘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요컨대 윤보선 대통령의 판단은 1군을 구데타군 진압에 동원하면 국군간 유혈과 민간인들의 희생뿐 아니라 북한군의 남침위험성 때문에 진압군동원은 고려하지 않았던 것 같다.

  5․16 쿠데타는 발발 사흘만에 장면 총리가 은신처에서 나타나 사임을 발표함으로써 혼돈시기를 넘어 일단 권력장악에 성공한 거처럼 보였다. 장면 총리는 1961년 5월 18일 낮 민주당 정권의 마지막 각의에서 내각총사퇴를 결의하고 정권을 군사혁명위원회에 이양함으로써 쿠데타군 진압여부를 둘러싼 군부의 동요와 불안상황은 종결되었다.

 나는 5월 18일 낮 장면 총리 사임발표와 동시 광화문과 서울시청앞으로 나팔을 불면서 5․16지지 육사생도행진대열이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때 나는 5․16이 군인특성 답게 무리한 각본대로 마침내 착착 권력의 뿌리를 내리고 있구나 하고 느꼈다. 언론인들의 앞날에는 앞으로 극심한 억압과 고난의 계절이 닥쳐오겠구나 하고 불안감을 금치못했다. 경향신문 폐간의 고통때 처럼 또 다시 어깨가 뻐근해지는 스트레스가 엄습했다. 당시 서울대 문리대 ROTC 교관이던 전두환 대위가 5.16 군사쿠데타에 동조하여 1,000명의 육사사관생도들을 지지행진에 동원했으며 육사생도들의 군사혁명지지행군은 장면 총리의 사임과 함께 선전효과가 컸다. 이를 계기로 전두환 대위는 최고회의의장 비서관으로 발탁되었으며 하나회를 중심으로 10․26후 신군부 우두머리로서 등장, 또다른 군부집권시기를 열었다.

 그후 1964년 민정이양시기까지 2년간 각부처 출입기자들은 기사를 취재한다기 보다 군사정부가 발표하는 아이템을 나르는 메신저 보이가 되다시피 했다. 그당시 나는 이웅희 선배를 따라 이진희(李振羲/후에 문공부장관)기자와 함께 중앙청에 출입했는데 감시가 심해서 취재소스를 만나 취재한다기 보다 주로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서 각부처가 나눠주는 배포문을 기다리는게 일이었다. 물론 민정이양일이 가까워오고 대통령과 국희의원선거가 있던 해인 1963년부터 취재탄압이 다소 누그러짐으로써 독자취재도 가능했다.

4. 문세광의 陸여사 저격과 10․26 朴 대통령 시혜사건

 나는 1971~73년 사이 동아일보에서 청와대를 출입했다. 마침 그시기 박정희 권위주의 정권은 경제성장에는 성공했지만 국민들의 유신체제 철폐와 민주화요구에는 부응하지 못함으로서 학생들과 야당과 극심한 갈등을 빚었다.

 박 대통령은 한두번 건너 뛸때도 있었지만 매월 청와대에서 출입기자들과 점심을 함께 하면서 환담을 했다. 청와대 출입한지 한달쯤 되어서 박 대통령과 점심식사가 있었다. 그때 나는 동아일보 출입 기자로서 박 대통령과의 첫 대면의 날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나는 박 대통령 바로 오른편에 자리가 정해졌다. 박 대통령은 전임자인 이진희 기자(그후 전두환 정권때 문공부장관)의 안부를 물으면서 나에게 담배를 권했다. 그는 담배함에서 담배를 꺼내 나에게 건네면서 라이터로 담배에다 불을 부쳐주기도 했다. 약간 미안한 생각도 있었지만 박 대통령은 퍽 자상하고 친철했다. 평소 담소할땐 이웃집 아저씨 같은 다정다감한 인상을 풍기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권력에 대한 비판자들에겐 서릿발 같이 단호했다.

 1960~1970년대 내 기억으로는 종합신문으로서 박 정권을 정면으로 대담하게 비판하는 신문은 동아일보뿐이었다. 동아일보는 성역이다시피 되었다. 박 대통령이 나에게 담배를 권하고 담뱃불까지 붙여준 것도 나 개인에 대한 관심이라기 보다는 끈질기게 청와대를 비판하는 동아일보에 대한 관심이자 배려인듯 싶었다.

  동아일보는 1972년 종신집권을 보장한 유신체제를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달래도 얼러도 안되는 동아일보를 굶겨죽어야 겠다는 모진 각오를 한것 같았다. 그는 1974년 12월부터 1975년 7월까지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해 잔인한 광고탄압을 했다. 그로 인해 동아일보는 막대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그래도 손을 들지 않았다. 전국의 각계각층으로부터 격려광고가 이어졌지만 그것만으로 신문을 지탱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도 몇개월동안 월급을 받지 못했다. 1974년 10월 선포된 동아 자유언론 실천운동이 민주화운동을 확산하는 형태로 급진전하자 박 대통령은 더 자극을 받은듯 했다. 동아 자유언론 실천운동은 1970년대 유신철폐와 민주화 운동에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언론에 대한 광고탄압이란 세계사를 통틀어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유신체제를 통해 종신집권을 꽤하던 박정희 정권에 동아일보는 늘 눈엣 가시처럼 껄끄러운 존재였다. 많은 언론이 숨죽이고 있는데도 동아일보만은 고개를 쳐들고 기사와 사설을 통해 불요불굴의 기자정신으로 유신체제를 비판해왔기 때문이다. 가톨릭의 유신헌법철폐를 위한 기도회, 잇따른 학생시위들과 유신을 비판하는 외신보도들이 동아일보 지면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으며 민주화운동에 탄력을 더해갔다. 가톨릭의 유신철폐기도회와 민주화 운동뒤에는 언제나 민주화의 성소인 명동성당과 김수환 추기경이 튼튼한 버팀목으로 우뚝 서 있었다.

 박정희 머릿속에는 늘 잠재적으로 동아일보에 대한 외경과 짝사랑이 자리하고 있었던 같았다. 왜냐하면 박 대통령은 동아일보가 항일 독립운동에 맨 앞장선 민족지로서 일제시대부터 자유당의 이승만 장기독재에 이르기까지 꿋꿋하게 언론의 고독한 외길을 흔들림없이 걸어온 것을 직접 보아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박 대통령의 친형 박상희(朴相熙)씨는 일제시대 동아일보 구미지국장을 했기 때문에 어릴때부터 그는 동아일보의 불요불굴의 독립정신을 잘 알고 있었다.

 한 자료에 따르면 박 정권때 애국적인 대미 로비스트인 김한조(金漢祚)씨는 박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신직수(申稙秀)에게 "동아일보를 혼내주라"고 지시했고 신직수는 그 임무를 국내담당 차장보 양두원(梁斗源)에게 맡겼다고 말했다. 1975년 2월 17일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김한조씨와 단 둘이 동아광고탄압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 이때 김한조씨가 "동아일보는 민족지이고 미국에서도 잘 알려진 신문입니다. 괜히 건드려 평지풍파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하고 광고탄압을 극구 말렸다. 이 말에 박 대통령은 "하긴 한국에서 신문이라면 동아일보지. 일제 시대 우리형님(朴相熙)도 동아일보 지국장을 하셨지. 미국에서야 '동아'라는 발음이 쉬워서 잘 알려졌을거야"하고 맞장구를 쳤다.

 내가 청와대 출입했던 1971~1973년 기간은 박 대통령에게 가장 험난하고 종말적인 사활적 시기였다. 국내에서 대학가와 명동성당 가톨릭교회를 중심으로 유신체제 반대와 민주화요구 데모가 쉬지않고 일어나고 성명발표도 잇따랐다. 북한은 남쪽내부의 이런 정치적 저항과 불안 갈등을 이용해서 박대통령에 대한 암살기도를 그치지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장기집권을 반대하는 저항세력들 입에 원천적으로 재갈을 물리려고 온갖방법을 취하다가 마침내 유신체제라는 '만병통치처방'을 창안한 것이다. 그는 1971년 유신체제 전단계조치로 파이롯트 프로젝트처럼 언론에 재갈을 물리는 비상사태를 선포였다. 이것이 성공하자 용기를 얻은 박 대통령은 곧 1972년 유신헌법공포로 유신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그는 이와 함께 1970년 8․15경축사에서 남북간 선의의 체제경쟁을 선언한데 이어 1971년 남북적십자회담을 통한 1천만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또 1972년에는 북한에 이후락(李厚洛) 중앙정보부장을 비밀리에 보내 김일성을 만나 남북간 7․4공동성명을 동시 발표케하는등 남북교류에도 담대한 접근을 했다. 이런 남북협상분위기를 통해 유신체제를 구축, 북한처럼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유신헌법에 따른 통일주체국민회의의 장충체육관식 집단주의적 대통령 선거방법은 사실상 박정희 이외의 다른 대통령후보가 나설수 없도록 막아놓았다. 유신체제는 박 대통령 스스로를 비상구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모는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청와대 논리는 7․4남북공동성명이후 앞으로의 남북관계는 접촉없는 대결에서 접촉있는 대결로 나가야 하기 때문에 남쪽정부의 토대가 유신체제로 난공불락으로 흔들림없이 탄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재정부가 강경하면 할수록 저항세력의 반대또한 강도를 더해가는 것이 자연 이치였다. 유신헌법은 박정희에게 초법적인 막강한 무소불위의 권한을 안겨주었다. 그는 헌법조항에 따라 1974년 1월 초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1호를 발령함으로써 재야와 대학가에서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긴급조치 1호는 첫째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정 또는 폐지는 물론 청원하는 행위조차  일체 금지했다. 유신헌법 반대와 폐지를 반대하는 내용을 선전하거나 보도 출판 기타방법으로 이를 남에게 알리는 일체의 언동을 금하고 이를 위반한자는 법관의 영장없이 체포, 구속, 압수, 수색하며 군법회의에서 15년이하의 징역에 처하며 15년 이하의 자격정지도 병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박정희 정권은 학생들과 종교인 등이 민주화와 인권을 요구하며 수업 거부나 시위, 유인물 배포 등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 1974년 4월 3일 긴급조치 제4호를 선포하여 학생들이 수업거부 등의 집단 행동을 할수 없도록 하였다.

 해방후 미군진주와 함께 들어온 자유사상에 어느정도 깊이 물든 국민들로서는 참을 수 없이 숨막히는 억압장치였다. 강할 수록 부러진다는 원리를 박 대통령은 왜 몰랐을까. 유신억압체제에 반대하는 저항의 불꽃이 전국을 휩쓸었다. 1974년 4월에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사건, 이른바 민청학련사건(民靑學聯事件)이 터졌고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구속·기소되었고 이들 대부분 중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1975년 2월 15일 대통령 특별조치를 통해 석방되었다. 중앙정보부에 의해 조작된 것으로 판명된 '인혁당 사건으로 도예종등 8명이 무고하게 처형되기도 했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피고인 8명의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 예비·음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유족들이 국가상대 소송(2007년 8월 21일)에서 서울 지방법원은 국가의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고 시국사건 사상 최대의 배상액수 637억여원(원금 245여억 원+이자 392여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북한은 남한내 장기집권 억압체제에 반대하는 여론에 힘을 얻은듯 부단하게 박 대통령의 생명을 노렸다. 그 첫 번째 암살기도가 1968년 1월 21일 일어난 북한 124군 특수부대의 청와대습격시도였으며 두 번째가 1970년 현충일인 6월 6일이었다. 북한 테러리스트 3명이 박 대통령이 헌충일에 동작동 국립묘지를 참배할 것으로 알고 현충문에다 원격폭탄을 미리 설치하려다 실수로 폭탄이 사전에 터지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테러리스트 1명이 현장에서 죽고 도주한 나머지 2명도 한국정보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세번째 박대통령에 대한 암살기도가 1974년 8월 15일에 일어났다. 박 대통령이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기념사를 하는동안 극장안에 잡입한 제일조총련계 북한공작원 문세광(文世光)이 권총으로 박 대통령을 향해 여러발 쏘았으나 총알이 빗나가 단상에 앉았던 육영수 여사가 맞아 피살되었다. 축하합창단원인 여학생 1명도 무고하게 숨졌다.

  육영수 여사는 그때 서울대 병원으로 급히 실려갔으나 곧 숨지고 말았다. 나는 이날 오전 미국무성 초청으로 김포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서 반포집에서 짐을 싸면서 당시 흑백텔레비전으로 국립극장의 그 비극적인 총격사건을 우연히 직접 보았다. 김포공항으로 가는 도중 육영수 여사가 운명했다는 비보를 들었다. 마음이 아팠다.

 청와대 출입기자로서 나는 육영수 여사를 눈여겨 보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새마을 운동시찰차 지방출장을 몇차례 다녀오기도 했다. 육영수 여사는 국가를 위해서 애국심을 갖고 '청와대안의 야당'으로서 박 대통령을 충성스럽게 보필해온 현모양처형 출중한 인물이었다. 그분은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도 깍듯이 정중한 예절로 대했으며 늘 부드러운 미소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해마다 연말이면 청와대 출입기자들(당시 20명)앞으로 예쁜 다이어리를 아무게 '기자님'이라고 직접 이름을 적어서 기자실로 보내오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나의 이름 한문자 끝자를 잘못쓴 일이 있었다. 성할무(茂)자인데 호반무(武)자로 쓴것이다. 이런 사실이 우연히 육여사 본인에게 알려져 그는 청와대 행사때 나를 만날때 마다 "내 참 미안해서" 하면서 어쩔줄 몰라해 하는 표정을 짓는게 아닌가. 그러다 보니 내가 오히려 더 미안할때가 많았다. 육영수 여사는 그정도로 체통있고 품격 높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수 있다. 전국민이 그의 별세를 슬퍼하고 지금까지 그의 덕을 우러러 존경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한번은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함께 지방출장중 경북 구미근방 어떤 나환자촌에 들렸다. 그때 나는 또 한번 놀랐다. 육여사는 일열로 죽 서있는 나환들의 손을 차례로 덥썩덥썩 겁 없이 잡으면서 악수를 하는게 아닌가. 나환자들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등 온전한 손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바싹 다가가 손을 잡고 친절하게 악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것이다. 역시 대통령 부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비범한데가 있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고 감동했다. 육영수 여사는 말씨, 예절, 자태, 옷차림등 어느면을 보아도 대통령 부인사주로 태어날 분으로 느껴졌다. 그분은 왕조시대 태어났더라도 황비가 되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했다.   나는 어느해 정초 청와대 출입기자단 세배때 육여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는 옷을 다림질 하면서 항상 라디오를 켜놓고 특히 은방울 자매가 부르는 '마포종점'을 즐겨들었다고 들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소녀시절 프랑스에 유학중에 육여사가 돌아갔다. 박 전 대표는 프랑스에 있을때 어머니에게 대사관 파우치로 안부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가 박 전대표가 육여사 돌아가고 귀국후 도착했다고 들었다. 얼마나 더 슬펐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육영수 여사가 청와대 안주인으로서 빈틈없는 내조를 하다가 돌아가고 나니 박 대통령은 하늘이 꺼지는듯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허전하고 외로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활이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니까 밤마다 놀러가는곳이 있어야 했을 것이다. 대통령도 인간이므로 가까운 사람들과 술 먹고 노는 오락도 있어야 할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1979년 10월 26일밤 궁정동 안가에서 측근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젊은 여성들의 노래를 감상하다가 바로 코앞에서 측근중 측근인 김재규가 쏜 총탄에 쓰러지고 말았다. 김재규는 1946년 육사에 입학할때도 구미역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갔다. 한고향 선배였으며 군에서는 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사이였다. 그런데 왜 하필 그렇게 믿었던 김재규가 그에게 총을 쏘았을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 일어난 일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록 헌정을 중단시키고 집권했지만 5천년의 가난으로부터 국민들을 탈출시킨 혁명가였다. 그는 불철주야 분골쇄신 노력했다. 그런 헌신적 노력 덕분으로 한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전세계의 찬탄과 함께 부러움을 샀다. 이승만 박사가 건국의 토대를 세웠다면 박정희는 나라를 빈곤에서 해방, 무에서 유를 창조함으로써 물질적 토대를 공고히 다진 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그는 측근에게 피살되었는가.

 역시 1인 장기집권과 종신집권의 유신체제를 위해 우격다짐의 개헌을 통해 반대와 대안을 내놓을 방법을 원천 봉쇄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1979년 유신말년 사면초가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북쪽에서는 남한내 악화된 민심을 빌미로 암살대를 잇따라 보내는 가 하면 남쪽에서는 전국적인 저항으로 궁지에 몰렸으니 그는 아무데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누구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탐욕스럽게 독식하면 언제나(독재시대나 민주시대나 마찬가지다) 스스로에게 칼날을 겨누는 이치와 마찬가지라는 것을 똑똑히 깨달아야 한다. 지금의 한나라당이야 말로 박 대통령의 서거원인에서 타산지석의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집권자는 항상 국민의 밑바닥 여론에 긴밀하게 귀기울여야 하며 소외계층을 긴밀하게 배려함으로써 감동정치를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5. 정인숙(鄭仁淑)사건 취재기

 1970년 3월17일 밤11시께 서울의 강북 강변도로(지금의 강변북로) 당인리 발전소와 절두산 근처에서 발견된 코로나 자가용 승용차 안에서 미모의 젊은 여인(26세)이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운전석에 있던 그녀의 오빠는 허벅지에 총상을 입고 신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사과정에서 죽은 여인의 신원이 밝혀지면서 이 여인과 정부고위층과의 염문설도 자연히 폭로되었다. 이사건은 당시 상당히 오랜기간 온나라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정치권력과 미모의 여인과의 남녀스캔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 어디서나 나타나는 권력층의 부도덕적 현상이었다. 1970년대 그날밤의 여인피살사건도 이런류의 고위층 관련 스캔들의 하나였다. 이무렵 북한에서도 우인회란 미모의 여배우가 고위층과의 염문을 뿌리면서 돌아다니다가 김정일 특명으로 총살된 적이 있었다.

 고대는 그만두고라도 1차대전때 독일을 위해 스파이활동을 했다는 마타하리 스캔들(1917년 10월 15일 처형), 현대에 이르러 영국 국방장관 프로퓨모 스캔들(Profumo scandal)의 주인공이었던 크리스틴 킬러(Christine Keeler)에 이르기까지 미녀와 권력층과의 스캔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경찰은 현장에서 허벅지에 관통상을 입고 신음중이던 운전사를 병원에 옮기는 한편,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경찰은, 피살된 사람은 정인숙이라는 여인이었고, 범인은 운전사인 그녀의 오빠 정족욱(당시 34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수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정종욱이 사생활이 문란, 가문을 더럽혔기 때문에 여동생 정인숙에 대해 분격한 끝에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정인숙에 대한 많은 권력층과의 난잡한 스캔들소문이 이미 세간에 널리 확산되었기때문에 대부분 여론은 경찰 수사 발표에 의문을 나타냈다.

 정인숙은 그 동안 하는 일도 별로 없이 고급 주택에서 살고 미국 뉴욕을 왕래하면서 일류 호텔과 카바레를 전전하며 호화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미 한국 대사관에 나타나 평소 자신이 말하면 깜짝 놀랄 모 고관과 깊은 관계라고 떠들고 다녔다는 것이었다. 신문은 한국판 '크리스틴 킬러' 사건이라고 떠들어댔고, 야당은 국회에서 진상규명을 따지면서 정치 문제화하였다. 정일권 국무총리의 이름이 수없이 거명되었고, 심지어는 박대통령 이름도 거명되었으나 확인될 수 없었다.

  정인숙 사건은 당시 제3공화국 고위층의 부정부패에서 비릇된 치부를 드러낸 고관들의 색스 스캔들로서 고위층과 위정자들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했다. 정인숙은 이른바 고급 접대부로서 정부의 고관대작들만을 상대 하였던 것인데, 이 사건이 터짐으로써 고위층의 부도덕한 타락상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이 사건의 전모는 지금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온갖 추측이 난무하였을 뿐 누가 왜 정인숙을 죽였으며 그와 놀아난 고위층 사람들은 어떤 인물들인가는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는 밝힐 수 없는 것이 수사의 한계이자 숙명이었다. 정인숙과의 권력 고위층 스캔들당사자가 밝혀지고 진짜 사인이 밝혀지면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문제가 정확히 밝혀지기란 불가능했다. 정종욱은 결국 19년간 옥살이를 하고 풀려났으며 그는 "나는 동생을 죽이지 않았다"고 살인혐의를 부인했다.

 정인숙사건이 온세상을 뒤흔들다시피 한지 10여년이 흘러간후 나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실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1983년 8월 어느날  南時旭 출판국장(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문화일보 사장)과 李正允 신동아부장(후에 출판국장)이 서울 무교동 서린호텔에서 함께 점심을 하게 되었는데 두사람이 그 자리서 정인숙 사건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두사람은 1970년대 정일권총리 재임시절 누가 중앙청 출입기자로 나갔는가를 수소문끝에 나를 찾아내게 된것이다. 1980년대 신문사소속 월간지들의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정인숙사건은 독자들의 관심을 끌만한 좋은 기사거리였다.

 그날 점심에는 동아일보 서울시경출입기자 반장이었던 K기자도 함께 초청되었다. 그가 수개월동안 정인숙사건을 취재해왔으나 자기는 그 기사를 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유는 정인숙사건 연루 고위당사자들이 아직 두눈이 시퍼렇게 살아있기 때문에 신변에 위해를 느낀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잘아는 서울시경 형사과장으로 부터도 "당신 총 맞으려고 그 기사 쓰려는가" 하고 몸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K기자는 점심자리에서 일찍 자리를 떠버렸다. 그때 이정윤 부장이 원고료 영수증과 함께 내게 돈봉투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당시 사건전문기자도 아닌 내게 신동아 부장이 이렇게 까지 매달리는데(?) 나는 마음이 약해졌다. 더구나 논설위원시절 동아대상까지 탄 대기자인 남시욱 출판국장이 이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간이 작아 매사 조심하는 편인데 사건자체를 한번 파헤쳐 보아야 겠다는 기자적 호기심도 동했다. 또 지나간 얘긴데 그 기사 썼다고 설마 총맞기까지야 하겠는가 하는 만용같은 대담성도 생겼다. 이 부장은 평소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부드러운데다 나에게 항상 소곤소곤 친절하게 잘 대해주어 마음에 들었던 탓도 있다. 이렇게 해서 나는 그 기사를 쓰기로 했다.

 나는 우선 머릿속에서 기사얼개를 그리기 위해 1970년 3월 17일 정인숙사건 다음날 있었던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사건보도 다음날 아침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정일권 총리를 만나 정인숙과의 관계와 사건전모에 관해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응접실에 나타난 정 총리는 "내가 평소 여자를 좋아하고 정인숙을 사랑한 것은 사실입니다"라고 솔직히 말했다. 두사람 사이 탁자위에 커피를 놓고 대화가 몇차례 오갔다.

  "그러면 누가 총을 쏘았습니까"

 "경찰수사결과 보고를 받아보니까 오빠 정종욱이가 쏘았어요"

 "왜 쏘았답니까"

 "오빠가 앞에서 운전을 하는데 뒤에서 동생이 남자와 키스를 하고 난잡하게 노니까 오빠로서 울분이 치밀어올라서 그랬다는군요"

 "정종욱 자신은 왜 다리에 총을 맞았습니까"

 "자세한 것은 앞으로 수사를 더 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화도중 정 총리에게는 연방 전화가 왔다. 그는 대화도중 몇차례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도 했다. 정인숙 살인사건에 대해서 밤새 정부 내부적으로 무언가 의견조율이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 총리에게 더 이상 물어봐야 나올것이 없을것 같고 석간마감시간도 촉박해서 그정도로 그치고 나는 총리공관을 나왔다. 또 그때 정총리는 매우 당황하고 분주한듯이 보여 자리를 떴다. 회사에 돌아와 정치부장에게 보고하고 있는데 또 다시 정 총리공관에서 전화가 왔다. 달려가서 하루아침에 두 번째로 정일권 총리를 만났다.

 그는 수사결과 보고라면서 같은 얘기를 되풀이했다. 정 총리는 안절부절 하면서 또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두 번째 만남에서 새로운 얘기는 없었고 앞에 말한 것이 진실의 전부라고 강조했다. 더 이상 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요컨대 부탁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정 총리가 그때 잘 써달라고 부탁한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당시 천하에 공개된 상황으로서 정 총리가 부탁한다고 해서, 또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그렇게 될일도 아니었다.  

 나는 이렇게 해서 K기자가 그동안 취재한 내용과 추가취재를 합쳐서 1983년 9월호 신동아에 <정인숙 미스테리>(160~183면)라는 긴글을 썼다. 그 기사가 보도된다음 신동아는 40만부로 껑충 뛰어올라 피크를 기록했다. 월간조선과의 간격을 한층 더 벌렸다. 기사가 나간다음 당시 정일권 총리 비서실에 있던 S씨로부터 두어번 항의전화가 왔다. 당신 그럴수가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이사정 저사정 다봐주다가는 기자질을 할 수 없었다. 당시 신동아 기사에는 생전의 정인숙이 어린 아들을 안고 서 있는 다정한 모자사진이 실렸다. 기자 아닌 인간으로 마음이 아팠다.

 정인숙은 166cm의 적당한 키에 계란형의 빼어난 미모로 26살된 여인으로 알려졌다.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한때 명지대학을 다녔다. 미스코리아,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도 접고 실의에 잠겼을때 요정에 스카우트돼 요정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녀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의 일류 요정들은 모두 '정인숙 데려가기작전'으로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이런 상황에서 요정정치시대 빼어난 젊은 미모의 정인숙이 정계고위층과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정인숙의 운명은 이때부터 결정된듯 싶었다.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 받은 정 여인의 오빠 정종욱씨는 1989년 형기를 마치고 교도소문을 나왔다. 그는 “나는 범인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의 아들이 확실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누명을 벗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씨는 1991년 정일권 전 국무총리를 상대로 친자확인소송을 냈다가 바로 취하했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된것이 아닌가 한다. 정씨는 2007년 발생한 골프장 사장 납치사건에 연루돼 징역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정인숙이 고위층과의 관계를 국내외로 떠들고 다니니까 정치부패와 성문란으로 인한 정권의 도덕적 타락상이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박 정권은 이런 정인숙이 정권안보의 위해인물로 보고 그의 입을 막기위해 매우 고심했던 것 같다. 따라서 정인숙의 죽음은 이런 맥락에서 다시 추적해봐야 되지 않을까 한다.

6. '땡전'뉴스와 시청료거부운동

 전두환의 5공 때 전국민들은 매일밤 KBS와 MBC의 ‘땡전’뉴스를 지겹도록 봐야 했다. 9시를 알리는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KBS와 MBC(당시 민영 SBS는 없었다)는 동시에 “전두환 대통령은…" 하며 뉴스를 시작했다. 심지어 엄청난 사고로 수십명이 죽어도 전두환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한가롭게 테니스를 친 소식이 먼저 나올 정도로 KBS는 막무가내였다.

 전두환 정권이 공영방송 사장 목을 틀어쥐고 있었을뿐 아니라 그때 방송은 군부와 중앙정보부와 함께 전두환 독재정권을 지탱해주는 3대 기둥중 하나였다. 거기에 문공부 보도지침이 가세해서 KBS는 꼼짝달싹도 할 수 없었던 때 였다. 그런 KBS가 좌파정권 10년간에는 김일성 찬양 친북 송두율을 민주화인사로 둔갑시키는가 하면 노무현 대통령 탄핵방송때는 매일밤 탄핵반대촛불시위를 클로스업 화면으로 비추는등 친북반미 이념편파 왜곡방송을 하느라 어지간히 고생도 많았다. 편파왜곡 방송으로 정권 나팔수역할을 충성스럽게 했던 KBS를 총지휘했던 사람은 보수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물러나지 않고 친북반미 방송의 타성을 버리지 않았던 정연주 사장이었다. 그는 결국 물러났고 배임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군부와 중앙정보부 보안사 그리고 문공부 보도지침까지 동원, 언론자유를 혹독하게 탄압하던 엄혹했던 전두환 집권 시기 동아일보만은 성역의식 없이 최대한 보도 논평했다. 나는 그때 동아이보 논설위원으로서 정치, 안보, 교육 매스미디어분야를 담당했다.

 나는 1986년 초부터 물밑에서 암암리에 움트고 있던 KBS시청료 거부운동 보도기사를 수개월동안 스크랩했다. KBS에 대해서 사설로 아무리 편파왜곡방송을 비판하고 공영방송의 불편부당 공정방송 자세를 권고해도 KBS는 들은채 만채였다. 그래서 나는 마침내 1986년 4월 3일자 사설에 "KBS시청료 거부운동-공정보도 원리살려 공영방송신뢰 회복을-"제목아래 KBS시청료 거부.운동의 불가피성을 일깨웠다.

  그 사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의 전파매스미디어는 공영방송으로 1원화돼 있기 때문에 시청자들에게는 공영방송외에 다른 채널 선택권이 없다. 바꿔 말하면 보도와 논평 오락을 겸한 종합방송은 KBS와 MBC등 두방송이 독점하고 있는 셈이다.

 1981년부터 85년 9월까지 소비자 즉 국민들이 납부한 시청료와 광고료는 8천 7백 27억원에 이르고 있으며 1985년 한해동안 시청료 수입만도 무려 1천 1백 15억원었다. 많은 시청료와 광고료를 내는 국민들이 무엇보다도 질높은 상품인 좋은 방송을 청취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공영방송인 KBS와 MBC가 정치성이 개재된 주요문제에 관해서는 늘 편파방송을 일삼음으로써 시청자들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음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특히 KBS TV등이 편파방송을 한다는 것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며 이미 고질화된 병폐가 되고 말았다. 국회가 열릴 때 마다 국회의원들이 이 문제를 추궁하고 매스미디어 교수 및 전문가 그리고 관심있는 국민들도 입만 열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것이 공영방송의 편파보도와 시정요구였지만 그후에 나타나는 결과는 마이동풍(馬耳東風)에 그치고 말았다.

 오죽하면 관심있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KBS시청료 거부운동까지 나왔을까. KBS와 MBC가 편파보도를 끝내 시정하지 않으면 이 조그마한 규모의 시청료 거부운동이 확산되지 않는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다. 지난 2월 11일(1986년) 한국기독교 협의회가맹 6개교단과 교회여성연합회등 기독교단체들이 KBS등 방송매체들의 편파보도를 비난하면서 <시청료거부기독교 범국민운동본부>를 발족시킨데 이어 1일에는 시청료거부를 촉구하는 교역자 세미나를 열기도 했다. <기독교범국민운동본부>는 “KBS를 보지않습니다” 라는 스티커를 제작, 각가정의 대문에 붙이는등 시청료 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펴나갈 계획이라고 하니 이 운동이 공영방송의 공신력에 끼치는 영향은 참으로 심대하다.

 KBS등 공영방송측은 차제에 뉴스보도와 논평의 3대원리인 정확성 객관성 형평성을 살려 공정보도를 해서 떨어진 신뢰를 회복해주기 바란다. 이것이 민간방송이 없는 한국에서 대부분 전체 시청자들이 공영방송에 바라는 조그마한 간절한 소망이다. 이번에는 시청자로서의 국민들의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권리인 이런 바람이 헛되지 않기를 기대해본다"

 KBS가 이 사설에 즉각 맞대응하면서 동아일보를 반격했다. KBSTV는 시청료거부운동 사설이 나가던 4월 3일밤 9시 '땡전뉴스'때 보조개가 나온 예쁘장한 남자앵커가 강력한 어조로 흥분해서 다음과 같은 비난방송을 퍼부었다.

 "이른바 민족지를 자처하는 동아일보가 책임있는 공영방송기관을 일방적으로 매도한데 대해 KBS는 심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동아일보가 오늘 사설을 통해 KBS시청료 불납운동을 부추기는 위험스러운 논조를 편 것은 법질서를 존중하고 국민을 안정과 상식위에서 선도해야 하는 언론기관으로서의 책임을 포기한 것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오늘 동아일보 사설 논조대로 KBS 시청료 불납운동에 국민들이 동조할 것인지는 국민들 자신들이 판단할 일입니다만 동아일보 논조를 모든 국민이 신뢰하고 지지한다는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 근거를 둔것인지 반문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KBS는 국민들이 내는 시청료와 광고를 합쳐 연간 2천6백 45억원의 세입을 갖고 있어 자칫 다른 매체에 비해 많은 돈을 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읍니다만 그러나 실은 3개 TV를 위한 하루 31시간의 TV제작과 8개 라디오를 위한 하루 435시간의 라디오 제작외에 전국에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793개 대소 시설의 유지관리, 12개국어에 의한 하루 126시간의 해외방송, 날로 더해가는 북괴의 대남 방송에 대비, 난시청해소, 또 86아시아게임과 88올림픽중계 방송을 위한 각종 투자등 국민들이 잘 모르고 있는곳에 많은 돈을 투입하지 않을수 없읍니다.

 KBS는 오히려 만성적 기자재 부족과 인원부족으로 어느 매체보다 과중한 업무량을 갖고 있다는 것을 국민여러분이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KBS는 앞으로도 국익을 옹호하고 공익을 향상시키고 방송문화의 창달을 위해 국민여럽분께 헌신할 것을 다짐합니다"

 나는 사설이 나간다음 편집국 김모기자의 정보보고를 통해 KBS내부 반응을 미리 대충 알고 있었다. 그 기자의 보고는 대략 다음과 같다.

  "KBS 보도본부는 3일(1986년 4월) 오후 회의를 열고 3일자 동아일보 사설 “KBS 시청료 거부운동”과 국회기사 4면 “예산낭비 35억원 적발”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 이날 회의에서 보도본부 간부들은 “KBS 시청료 거부운동에 관한 동아일보 사설이 시청료 거부운동에 동조하고 이를 부추기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라고 결론짓고 언론매체로서 지나친 처사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이날 보도본부의 분위기는 대단히 고조되었고 일반기자들까지도 흥분해 있었다. 결국 밤 9시뉴스에서 이문제를 거론하고 동아일보에 유감의 뜻을 방송하기로 결정했다. 동아일보와 싸워보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음날(4월 4일) 동아일보는 1면부터 사회면까지 요란하게 시청료 거부운동의 당위성과 편파왜곡방송에 대해서 집중보도했다. 내가 쓴 사설이 오랫동안 전국민 가슴속에서 부글부글 끓으면서 내연하던 불평불만의 불씨에 처음으로 점화한 셈이다. KBS 앵커는 4월 4일밤(금요일) 9시뉴스센터 프로에서 발끈하면서 격한 반응을 나타냈다. KBS는 동아일보 사설과 뉴스보도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거듭 집중비판했다.

 "KBS는 거듭되는 동아일보의 KBS에 대한 편파왜곡 보도에 대해서 그동안 은인자중해 왔읍니다. 그런데 어제 동아일보가 사설에서 일부의 시청료 불납운동을 부추기는 논조를 폈기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서 이시간을 빌어서 해명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동아일보는 사실보도라는 미명아래 구체적 내용확인도  없이 일부 야당의원의 발언을 그대로 보도하는가 하면 일부 단체들의 시청료 거부운동을 거듭 선동하고 나섰습니다. 이것은 KBS의 경영을 위협하는 매우 심각한 일입니다.

 동아일보가 주장하는 이른바 사실보도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매일 국내외에서 입수되는 수백건의 사실가운데 동아일보가 취급하는 것은 100여건에 불과합니다. 즉 동아일보의 기준에 따라서 그가운데 필요한것만 보도 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무엇이 기사를 거르는 기준이 된다고 보십니까. 국가이익, 사회안정, 경제발전, 국제사회에서의 한국의 위치등이 그 기준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시청자 여러분들께서는 보셨으리라 생각되는 어제 날짜 동아일보 사회면 머릿기사 “전쟁 난다 뜬 소문, 어린이들 겁먹어”라는 제하의 장문의 기사는 어떤 기준에서 편집된 것인지 동아일보의 양식을 의심치 않을수 없는 것입니다. 지나버린 하나의 덧 없는 소문을 그토록 대서특필해서 천진난만한 어린이들의 가슴속에 위기감을 조성하여 무엇을 얻겠다는 것입니까. 동아일보의 이러한 무책임한 보도는 부진한 판매부수를 만회하려는 무분별한 선동주의라는 지적을 면하기 어려울것입니다."

 그러면서 KBS는 "어제 날짜 동아일보에 대해서 국민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조순형 기자가 취재해 봤습니다"라면서 독자의견을 녹음해서 집중 보도했다..

 “마치 우리나라 전체 어린이들이 전쟁공포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것처럼 제목부터 엄청나게 과장된 어제 날짜 동아일보 사회면 톱기사입니다. 놀란 동심들은 울며 불며 집에 돌아가 학부모들에게 유언장까지 써놓는등 소동이 빚어지고 있다며 마치 온나라 어린이들이 불안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있습니다" KBS는 이어  전혀 뜬 소문을 모르던 일반시민, 어린이들에게 전쟁공포의 소문을 강력하게 전달했다고 비난했다.

 KBS는 또 윤중학교 교감 장모씨의 "전쟁얘기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는 녹음내용을 내보내는가 하면 전국에 걸쳐 여러국민들과 교사 교장들을 등장시켜 동아일보를 집중 비난하는 말을 녹음으로 내보냈다. 끝으로 보도기자는 “따라서 여론을 특정방향으로 이끌어 가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 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됐습니다”라고 논평했다. KBS는 뉴스 마지막 멘트에서 다시 한번 동아일보에 대해 사회 공기로서의 책임을 다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끝을 맺었다.

 1958년부터 현재(2009년 4월현재)까지 숱한 격동기를 겪으면서 저술과 칼럼을 쓰면서 일관되게 고독한 언론 외길을 걷다보니 가슴에 묻어둔 비화도 많지만 후일 회고록감으로 남기기로 한다.<끝>